특별기고/ 함평 민간인 학살 사건

전남희망신문 승인 2020.12.11 13:55 의견 0


정근욱 함평유족회 회장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함평 사건의 만행이 밝혀졌으나 아직도 국가는 아무런 답이 없다.

정근욱 함평유족회 회장에 따르면 함평에서 ‘5중대’란 1950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불갑산 지역 공비 토벌을 목적으로 해보면 문장마을에 주둔했던 국군 11사단(최덕신 준장) 20연대(박기병 대령) 2대대(유갑열 소령) 소속 5중대(권준옥 대위)를 일컫는다. 함평 사건의 주범들이다.

5중대는 1950년 12월 6일부터 1951년 1월 14일 사이에 나산, 월야, 해보 3개 면의 10여 개 자연부락에 거주하던 비무장 민간인 524명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갓난아기부터 노인까지 희생된 주민은 모두 ‘적 소탕 실적’으로 상부에 보고되었다. 농가의 호미, 낫 등 농기구는 전투 노획물로 둔갑했다.

부대는 무고한 민간인 집단학살도 모자라 마을마다 작전지역 내의 가옥을 불태우고 현금과 가축 등을 닥치는 대로 약탈해갔다. 눈에 띄는 젊은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했다.

이에 함평군 나산면·월야면·해보면 3개 면 주민들에게는 ‘5중대’라는 말이 오랜 세월 각인되어 공포와 분노의 대명사다. 떼쓰며 우는 아이는 “5중대 온다”라는 말만으로 울음을 뚝 그쳤다. 어른들은 5중대 얘기만 나오면 “그 죽일 놈들”이라는 분노의 탄식을 절로 쏟아냈다.

그로부터 70년이 흘렀지만, 정부와 군은 단 한 번도 피해 유족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맺힌 가슴을 부여안고 살아온 피해 유족들이 먼저 국가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함평 민간인 학살 사건유족회(함평유족회)’는 2005년 가해 부대인 5중대 소속 사망 군인 2명의 위령비를 사건 현장에 세워 관리해왔다. 그 중심에, 유족회를 이끌어온 정근욱 씨가 있다.

정근욱씨는 함평군청 공무원으로 월야면장을 지냈다. 지난 20여 년 동안 5중대의 실체를 추적했다. 그 와중에 작전 중 사망했지만 군에서 은폐해 진실을 감춰버린 5중대 소속 군인 2명의 신원을 파악했다.

그 두 사람의 죽음이 가공할 만한 민간인 집단학살의 시발점이라는 사실도 파악해냈다. 유족들에게 그들의 위령비부터 세워주자고 설득했다.

당연히 피해 유족들은 ‘천부당 만부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유족들로서는 ‘가해자가 사과와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위령비까지 세워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2005년 당시 정근욱 회장은 우리 피해자들이 통 큰 결단으로 먼저 국가에 손을 내밀어 용서와 화해의 모범 사례를 만들어보자고 유족들을 설득했다.

“뒤늦게나마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통과로 발족한 대통령 소속 ‘진화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함평 사건도 조사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이뤘다.

마침 가해 부대 전사자 2명은 경북 영천과 경주 출신으로 공비와 교전 중 사망한 사람들이었다. 유족회가 그들에 대한 위령비를 세우는 것은 영호남 화합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함평군 종합사회복지관 2층의 함평유족회 사무실 입구엔 5중대 소속 사망 군인 2명의 원적지 등본이 붙어 있다. 김영광 일병과 김추길 하사다. 1950년 12월2일 월야면 ‘한새들 전투’에서 전사했다.

5중대가 함평 인근 지역까지 통틀어 최초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날은 1950년 11월27일이다.

지리적으로 월야면과 붙어 있는 광산군 본량면 덕림마을에서 주민 6명이 새끼를 꼬며 노루 고기로 회식하던 현장을 급습해 전원을 총살해버렸다. 당시 군은 이 지역에서 3명 이상의 모임을 금지하는 내용의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였다. 계엄령을 위반했다고 살해한 것이다.

이로부터 20일 가까이 지난 같은 해 12월6일부터 민간인 집단학살이 본격화된다. 학살의 계기는 12월2일 함평군 월야면 동촌마을 앞 들판(속칭 한새들)에서 전개된 5중대 1개 분대와 공비 잔당 사이의 교전이었다.

야산에 올라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공비들이 들판의 5중대원 2명(김영광 일병, 김추길 하사)을 사살해버린 것이다.

5중대는 하루 종일 이어진 전투에서 공비들의 저항을 돌파하지 못했다. 결국 전사자 2명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식을 치른 뒤 ‘보복(?) 작전’을 전개한다. 문제는, 그 보복의 대상이 공비가 아니라 한새들 주변의 넓은 평야 지대에 흩어져 살아왔던 무고한 민간인이었다는 점이다.

1950년 12월6일 동틀 무렵이었다. 5중대 군인들의 첫 희생 제물은 함평군 월야면 장교마을이었다. 군인들은 집집마다 돌며 “살고 싶으면 집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주민들이 사는 집의 지붕에 불을 질렀다. 주민들은 불길이 너울거리는 가운데서도 마을 앞 논두렁에 모일 수밖에 없었다. 그곳엔 기관단총이 설치되어 있었다. 주민 21명이 비명에 갔다.

지금도 장교마을에 사는 안종필씨(72)는 당시 두 살의 어린 나이로 어머니 등에 업혀 있었다. 어머니의 왼쪽 손목을 뚫고 나온 총탄이 안씨의 엉덩이를 관통했다. 그 자리엔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5중대는 이웃 동촌마을로 향했다. 80여 가구가 사는 큰 마을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끌려 나오고 집 집마다 지붕에 불이 붙은 가운데 무차별 집단학살이 벌어졌다. 기관총으로 마을 앞 논두렁에 모인 주민 55명을 사살했다. 두 마을을 초토화한 5중대는 주둔지인 문장마을로 돌아갔다.

이튿날인 1950년 12월7일 새벽, 5중대 군인들은 월야면의 7개 마을을 급습했다. 순촌, 송계, 괴정, 동산, 지변, 내동, 성주 마을이었다. 군인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7개 마을의 주민 1000여 명을 지변마을 앞의 ‘남산뫼’로 끌고 갔다.

정근욱 함평유족회장은 당시 어머니 젖을 갓 뗀 두 살짜리 유아였다. 나중에 들은 바에 따르면, 근욱은 그날따라 하필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그의 부모는 유아의 울음이 군인들을 자극할까 봐 아이의 입을 막고 달래며 진땀을 뺐다. 다행히 수 많은 주민들이 한꺼번에 남산뫼로 끌려가는 틈 바구니 속에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5중대는 전날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해했으나. 이날은 17~45세 남녀만 살해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15세 미만 어린이와 노인들이었다.

군인들은 이들에게 성냥을 주어 돌려보내며 각자 자기 집에 가서 불을 지르라고 했다. 불을 지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아이들이 남산뫼를 내려오는 가운데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17세부터 45세 사이의 주민 120여 명이 집단 총살당한 것이다.

정 회장은 이후 남산뫼에서 자신의 형이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듣게 된다. “형은 1차 총격에서 부상당한 채 살아남았다. 5중대장 권준옥이 ‘아직 총 안 맞은 사람은 살려줄 테니 일어나 집에 불 끄러 가라’고 말했다. 그 말에 속아 형을 비롯한 6~7명의 주민이 일어나 마을로 향하다 조준 사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사흘 뒤인 1950년 12월10일, 5중대는 함평군 월야면 외치마을 주민들을 모두 공동묘지로 불러냈다. 전날 공비들이 파헤친 마을 앞 도로를 주민들의 소행이라고 덮어씌웠다. 이번엔 35명을 살해했다.

1951년 1월12일, 5중대는 모평마을을 습격해 주민 80여 명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당시 네 살이던 장종석씨(74)는 모친과 함께 외가인 모평마을에 들렀다가 집단학살을 겪었다. 4세의 아이가 발목 관통상을 입었다. 그의 부모와 동생(당시 2세), 외조부모는 모두 목숨을 잃었다. 삽시간에 천애고아로 전락한 장씨는 다리에 심각한 장애를 입었다.

1951년 1월14일, 5중대는 해보면의 3개 마을 주민들을 일명 ‘쌍구룡’이라는 야산 밑 논으로 불러 모아 60여 명을 학살했다.

사살된 주민의 시신은 바로 옆 방죽(작은 둠벙)에 쓸어 넣었다. 당시 16세로 현장에서 조부와 어머니, 남동생의 시체 더미에서 살아남아 고아가 된 임정례씨(86)는 인근의 성대마을에 살고 있다. “할아버지 처갓집이 있는 이 마을로 피란 왔다가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나는 총을 안 맞고 쓰러졌는데 군인들이 시신으로 알고 방죽 물속으로 던졌다. 얼음장 속 핏물이 흐르는 시신들 틈으로 고개만 내밀고 숨 쉬며 죽은 척하고 있다가 군인들이 떠난 뒤 기어나왔다.”

5중대는 주민 학살 외에도 잔악한 만행을 숱하게 저질렀다. 마을을 습격하면서 무차별로 방화했고, 가축들을 약탈해갔다. 5중대장 권준옥은 성폭행까지 주도했다.

저항하는 여성은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상귀밀마을 주민인 김영원씨의 증언이다. “5중대가 마을에 있는 젊은 처자 4명을 욕보였다. 그 소식을 듣고 당시 18세였던 정 아무개가 몸을 숨겼다. 군인들은 아버지가 딸을 내놓지 않자 마을 벌판으로 끌고 가 총살해버렸다.”

성폭행은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정근욱 유족회장의 증언이다. “5중대는 월야면, 해보면, 나산면 등 일대 마을들을 순찰하다가 젊은 처녀나 부인들을 ‘조사할 것이 있다’며 주둔지로 끌고 갔다.

붙잡혀간 여성들은 두 달 동안 갇혀 지내며 하룻밤에 20~30명에 달하는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풀려난 여성들 중엔 이후 결혼한 뒤에도 불임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1950년 12월7일 자행된 남산뫼 학살 현장에 국방부 정훈국 소속 선무공작대원이던 윤인식씨가 있었다. 윤씨는 권준옥 중대장의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학살 작전에 대해 ‘지나치다’고 항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나마 17~45세 주민들을 선별해서 살해한 이유라고 한다. 5중대의 만행이 11사단 상층부에 제보된 정황도 있다. 당시 함평군 나산면장이 목숨을 걸고 항의했다고 한다. 심상치 않은 보고가 거듭되자, 군은 5중대장 권준옥을 슬그머니 병기 창고 장교로 보직 이동시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건의 진상은 은폐됐다.

이후 국방부는 5중대가 1950년 11월 말부터 다음해 1월 말까지 함평에서 저지른 민간인 살육 작전을 ‘공비토벌사’에서 빼버렸다. 11사단 역사를 담은 ‘11사단보’에서도 당시 5중대가 벌인 공비 토벌작전에 대해선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자연스럽게 ‘한새들 전투’에서 전사한 5중대원 2명의 기록도 삭제되었다. 그들의 신원을 밝혀낸 이들은 군이 아니라 피해 유족이었다.

남산뫼 학살 유족 등 함평 사건 피해자들은 수십 년 동안 입도 벙긋 못한 채 살았다. 1993년에야 비로소 유족회를 결성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공무원이던 정근욱 현 함평유족회장이 진상규명 활동에 전면적으로 뛰어든 것은 1996년 민선 1기인 정원강 함평군수가 유족회 활동을 전폭 지원해줬다.

당시 정근욱씨는 함평군청에 신설된 정책개발담당관을 맡았다. 함평 학살 사건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책이었다. 그는 함평유족회장까지 겸했다. 전국을 발로 뛰며 권준옥 중대장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 권준옥이 1970년대 초 중령으로 예편한 뒤 이름을 바꿔 정부산하기관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권준옥은 69세로 사망한 뒤였다.

그러나 끈질긴 노력 끝에 권준옥의 당시 연락병이 제주도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냈다. 1990년대 후반 정근욱은 제주도를 들락거리며 두려움에 입을 떼지 않으려는 김 아무개씨(함평 학살 당시 일병)를 설득했다. 정근욱의 삼고초려에 감동한 김씨는 결국 입을 열었다.

“12월2일 한새들 전투 때 5중대원 2명이 산에 은신한 공비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전투가 너무 늦게 끝나 일단 중대본부가 있는 문장마을로 철수한 뒤 이튿날 낮에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 공비들이 전사자의 옷과 소지품을 다 벗겨가고 시신에 난도질을 했더라. 5중대장은 두 병사를 화장하면서 ‘너희 둘 저승 가는 길에 외롭지 않게 수천 명의 길동무를 딸려 보내주마’라고 복수를 다짐했다. 그다음 날부터 중대장은 보이는 마을마다 사람들을 불러내 무조건 총살하라고 했다.”

김 아무개 당시 연락병은 함평 지역뿐 아니라 5중대가 나주 영산강 유역 백사장에서 자행한 민간인 집단학살에 대해서도 사실확인서를 써주었다. 이 집단학살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정근욱 회장은 5중대의 민간인 집단학살 당시 이 부대의 작전회의를 참관한 당시 함평경찰서 이계필 월야지서장으로부터도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중요한 증언을 이끌어냈다. “5중대 작전회의에서는 하루 무조건 50명을 사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권준옥 5중대장은 학살 과정에서 공비와 주민을 가려내기 위한 조사도 하지 않았고, 공비에게 협조한 자도 가려내지 않은 채 무조건 사살하도록 했다.”

학살 현장의 사정을 잘 아는 가해자 측 증인들뿐만 아니라 불법 학살의 단서를 잡을 수 있는 군 내부의 핵심 자료도 상당수 확보했다. 정근욱은 국방부 간행 ‘공비토벌사’와 11사단보, 20연대보 등을 확보해서, 한새들 전투에서 5중대원 2명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군이 아예 누락시켰다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군에서는 5중대의 활동 가운데 ‘대보름 작전(1951년 2월20일 벌어진 불갑산 빨치산 토벌)’만 기록해뒀다.

이런 증언과 증거서류를 확보한 정근욱은 인권단체와 학계, 언론계를 상대로 함평 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을 주요 인권 의제로 다뤄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2000년 제주에서 열린 전국인권학술회의에 유족 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 후 학계와 법조계에서 전국의 민간인 학살 해결을 위한 입법 촉구 범국민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때부터 정씨는 서울과 함평을 부지런히 오가며 전국 각지의 민간인 학살 유족들과 힘을 합쳤다. 2012년에는 11사단 5중대는 물론 함평 지역의 다른 군부대와 경찰이 자행한 학살의 피해자 유족까지 총괄한 ‘통합유족회’를 만들었다.

2006년 유족들은 진화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다음해 진상규명 결정이 나왔다. 진화위는 함평에서 벌어진 학살 만행을 사건별로 조사했다. 모두 898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군경의 토벌작전 과정에서 불법 학살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중 11사단 5중대에게 희생된 민간인은 258명이었다(신청 유족의 희생자). 피살자 명단도 공개되었다(함평 사건 유족회는 연좌제를 두려워해 신고 접수를 하지 않은 390여 명의 피해자를 포함하면 피학살자가 12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2009년 진화위는 조사 결과를 토대로 국가가 함평 사건 희생자 유족에게 공식 사과할 것, 희생자에 대한 위령시설 설치 등 위령사업 지원 방안을 마련할 것, 역사 기록을 수정하고 공공기록물에 사건 관련 내용을 알릴 것 등을 권고했다. 그러나 국가의 후속 조치는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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