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 문화탐방 기행문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찾아서
전남희망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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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3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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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1일 3일째
전날 백두산 천지 여행 일정을 마무리한 우리 일행의 3일째 되는 일정은 여유로웠다. 국제호텔 식당에서 조식을 마치고 9시 20분에 전용버스는 호텔을 출발 용정시로 향했다.
연길에서 버스로 약 25분정도 달리면 해란 강이 흐르고 항일독립의 근거지인 용정시이다. 용정시는 100년전에 개척하기 시작했으며, 1883년 함경도 회령에서 넘어온 조선농민이 해란강 유역을 개척해 마을을 만들고 옛 우물자리를 찾아 우물을 만들어 용정(龍井)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용정은 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특히 민족시인인 윤동주가 중학교를 다녔으며, 항일 역사와 함께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연길에서 용정시로 가는 길 야산에 정자가 눈에 띈다. 중국 길림성 용정시의 비암산 정상에 위치한 ‘일송정’이다.
비암산 정상에 독야청정 서서 고국을 바라보는 일송정은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의 애틋함이었다고 한다.
일제의 박해를 피해 용정시로 이주한 많은 사람들 중에는 민족 지도자들이 많았는데, 민족 지도자들은 자주 일송정에서 조국의 앞날을 논의 했으며, 봉오동, 청산리 전투 이후에도 일제의 학살과 억압 속에서도 일송정 모임은 계속 되었고, 이를 눈치 챈 일제가 이 모임을 강제 해산했다.
이에 일제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일송정 주변을 군사훈련지로 지정하고 일송정을 사격 목표로 삼았다.
그도 모자라 1938년 조선의 정기를 끊는다면서 일송정에 약물을 투여 결국 고사시키기에 이른다. 항일 무장투쟁의 본거지였던 연변의 정신적 상징을 없앤 것이다.
1991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는 한국 각계의 도움으로 옛 자리에 소나무를 다시 심어 복원하고, 정자를 신축해 그해 9월 준공했다.
이후에도 여러 도움의 손길이 이어져 확장 및 보수가 이뤄졌으며, 용정시 문물관리위원회는 보호문물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현재는 용정 8경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길림성을 찾는 한국인들이 빠지지 않고 들리는 곳이 바로 백두산과 일송정이다. 우리 일행은 차창관광으로 마무리 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민족시인 윤동주 선생이 다녔던 용정중학교(구 대성중학교)를 방문했다.
용정중학은 일제 강점기 시절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공부했던 곳으로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연변자치주 용정에 위치하고 있다.
독립투사들이 세운 민족학교, 헤이그 밀사,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 안중근 의거, 저항시인 윤동주에 대한 역사가 사진과 설명으로 전시되어 있어 민족의 혼을 일깨워 주고 있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도 이렇게 독립운동의 역사를 잘 정리하여 후대들에게 그 정신을 계속 이어주고 있다. 과연 우리정부는 독립운동에 대한 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용정중학교 교문에 들어서면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 시비(詩碑)
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용정 중학교 건물 2층에 역사 전시관으로 향했다. 2층 전시관에는 윤동주 시인의 화보, 책자 등과 1900년대 초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항일운동을 펼친 인물과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관에는 해설가가 상주해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상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며, 입장료는 무료이나 관람 후 기부금 명목으로 방문객이 자발적으로 기부를 하고 방명록에 서명을 한다. 기부금은 이곳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쓰인다. 우리 일행도 역사관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다.
우리 일행은 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기념촬영 후 10시30분 전용버스에 몸을 싣고 중국과 북한의 접경 지역인 도문으로 향했다. 40여분 쯤 달리는 차창 가에는 두만강을 사이로 북한의 산과 주택이 시야에 들어왔다.
국경 지역에는 큰 나무가 없고 헐벗은 산들이 계속 보였다. 북한 주민들의 탈출을 막고 밭을 경작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 낸 것이다. 한 낮에 밭을 매는 아낙네도 보였다.
우리일행은 두만강 변에 위치한 식당에서 유기농 식 점심을 먹고 두만강 접경지대에 조성된 강변공원으로 향했다. 북한과 중국의 경계를 나타내는 비석이 있으며, 북한의 함경북도 남양시를 가까운 거리에서 조망할 수 있었다.
북한을 중국 도문에서 두만강을 국경으로 바라보는 마음은 찹찹했으며, 남한은 3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고 다른 나라와 국경을 접할 기회가 없는 우리 일행은 국경의 모습을 실감하게 했다.
중국과 북한은 도문대교로 연결되어 있으며 붉은색 페이트는 중국, 파란색 페인트는 북한으로 정하고 있었다. 도문대교의 국경은 건널 수 없으나 두만강을 가로 지르는 작은 배를 이용해 북한 지역을 통과해 근접거리에서 북한의 산야를 볼 수 있었다.
두만강 물은 흙탕물 이었으며, 오염이 심해 현재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준설작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일행은 유람선 여행을 마치고 강변에 있는 주점에서 통북어 안주에다 막걸리 한 사발씩을 마시면서 인접해 있는 북한 전경을 바라보며 뭔가 표현할 수 없는, 가슴이 멍멍 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한 민족이면서 서로를 적으로서 경계하고 하나가 되기 어려운 현실로 우리는 선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상과 이념의 다른 통치구조가 우리 민족에 얼마나 큰 아픈 상처로 언제까지 지속될지 암울한 먼 미래를 회상하면서 우리일행의 백두산 관광일정의 마지막 코스를 마무리 했다.
우리일행은 2시경 도문을 출발 길림성에 있는 호텔 숙소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장뇌삼을 재배하는 밭을 들려 체험도 했으며, 농산물 판매하는 곳을 들려 쇼핑도 하고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도 했다.
장시간 버스로 이동하는 관계로 오락도 하고 소주도 한잔 하면서 즐거운 일정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결론을 말한다면 중국과 한국문화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라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우리일행 중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승차하는 과정에서 중국인 운전기사에게 ‘시 팔러마’라고 말한 게 화근이 되었다.
중국말로 ‘식사하셨습니까?’를 ‘니 츠팔러 마~’ 의 뜻이 랍니다. 그런 가운데 기사님은 우리 일행이 표현한 말을 욕으로 받아들이고 굉장히 격앙된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가이드에게 충분한 설명을 했는데도 운행 중 급제동을 하는 등 난폭운전을 하면서 우리일행에게 감정 표현을 한 것입니다.
도저히 우리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격분한 우리 일행은 차를 교체해야 한다는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했을 경우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일행에게 돌아올 입장이었습니다. 현 상황은 중국이었으니까요.
우리 일행은 감정을 정리하고 먼저 숙소에 도착한 후 운전기사에 대한 행동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숙소에 도착한 후 일행은 관광회사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까지의 사건에 대해 항의를 했고, 결론은 운전기사가 우리 일행에게 잘 못 되었다는 사과를 하고 우리일행도 잘못 된 언어의 표현에 대해 유감을 표현하면서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일행이나 운전기사 등 각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넘어갈 수 있는 사건이었다.
운전기사와 3일 동안 같이 움직인 상태였고 대화는 나누지 않았지만 우리 문화로 표현하면 정이 들 수 있는 시간이 흘렀다. 그 과정에 특별히 감정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령 말 실 수를 했더라도 넘길 수 있는 입장이었다.
운전기사가 스트레스 받을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에게는 대국이라는 자부심이 마음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우리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생각을 해 본다.
아무튼 우리 국민이 중국 관광을 많이 다녀오고 있습니다. 중국인도 우리나라를 많이 방문하고 있구요.
타국에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니까 자기나라의 소중함도 느끼게 되지만, 필요 없는 인정 또한 베풀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화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은 서로 이해할 수 있을 듯싶은데, 하기야 우리도 주변사람들과 아웅다웅 싸우면서 사는데 무리한 바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3일째 일정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8월12일 4일째
아침이 밝았습니다. 어제 일정 속에 속상한 일로 과음을 한 관계로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았습니다. 일행들은 호텔에서 조식을 마쳤는데 저는 객실에서 라면으로 해결 했습니다.
무거운 몸을 전용버스에 실고 우리 일행은 호텔을 출발 장춘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9시경 장춘 공항에 도착으로 중국에서 백두산 관광 일정은 모두 마무리 된 것입니다.
버스에서 짐을 내리고 운전기사에게 수고 했다고 악수를 청해 악수를 했지만 표정이 별로 였습니다.
버스기사는 우리일행과 작별인사도 안하고 곧 바로 공항을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 사과는 형식적이었다는 뜻이지요.
운전기사 한 사람이 중국인 모두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처음 중국관광을 다녀온 저는 중국인들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이미지는 갖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남겨놓은 교훈은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는 서비스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1시55분 중국장춘 공항을 이륙해 오후 3시경 인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4시경 인천공항을 출발 9시경에 목적지에 도착해 3박4일의 백두산관광을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하면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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